모든게 '나쁜 대통령'과 그 패거리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대통령과 패거리들이 나쁘다는 건 분명히 동의하지만, 나보다 더한 놈을 욕함으로써 내 문제를 면피하려는 태도는 어른스럽지 않습니다. '이미 그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끼리 그 대통령을 욕하고 조롱하는 카타르시스 놀음'을 의미있는 진보적인 행동인 양 여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물은 괴물이 내 앞에만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의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괴물은 내 안에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이런저런 의미 있는 사유와 담론들을 내 삶에, 일상에 적용하려는 순간 "그래도 현실이..........."하며 한발 빼는 내 안에 말입니다.
보수적인 부모는 당당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내몰고,
진보적인 부모는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는다.
보수적인 부모는 아이가 일류대 학생이 되길 소망하고,
진보적인 부모는 아이가 진보적인 일류대 학생이 되길 소망한다.
p.37
자본주의가 끔찍한 체제인 이유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든 인간적 관계를 상업적 관계로 바꾸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저는 아이들이 밥을 함부로 남기면 '고생한 농부들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말하는데 그게 바로 인간적 관계지요. 다른 이들의 노동이 나를 위하고 내 노동이 다른 이들을 위한느 것 말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그게 바꾸죠. 아이들이 이렇게 반문한다고 가정해보세요. "농부들은 자기 돈 벌려고 하는 거잖아." 이게 바로 상업적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모든 노동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것일 뿐 아무런 자부나 보람을 가질 수 없습니다.
p41
우리는 한 사람의 실체를 생각할 때 육체라는 껍데기, 이른바 색의 차원을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껍데기가 아니라 실체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죽는다고 하는 건 육체, 실체를 잠시 담고 있던 껍데기의 죽음을 말합니다. 죽은 육체가 살아나는 건 그 자체로 어떤 가치를 담는 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매우 특별한 신비 현상이거나 대단한 마술일 뿐입니다. 누구도 마술을 보고 가치관과 인생을 바꾸진 않습니다. 감탄할 뿐이지요. 우리가 가치관과 인생을 바꾸는 유일한 경로는 깨달음을 통햇 입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했던 건 스승의 육체가 재생했는가, 아닌가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육체의 목숨이 진정한 목숨이 아니'라는 스승의 말을 어느 순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육체의 죽음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에게 부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p79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다고? 엄마의 죄야말로 끝이 없어 보인다.
p83
반어법
이따금 아이들이 묻는다. "아빠는 몇 살까지 살고 싶어?/뭐 60살?/ 더 오래 살면 뭘 해/ 그럼 아이들은 짐짓 안타까운 얼굴로 "안돼. 더 살아야지"하고, 나는 싱겁게, 속으론 적이 흐뭇해져서 웃곤 한다. 그런데 만일 그 자리에 일흔을 넘긴 내 어머니나 아버지가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 말이란 그런 것이다. 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실은 말의 '외부'에 있다. 똑같은 말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이 된다.
p107
지배계급은 언제나 인민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개념 흐리기'를 사용한다.
한국에서 그 시작은 제 군사 파시즘을 '한국식 민주주의'라 설파한 박정희다. '우리의 정치가 서구식 민주주의와는 다르지만 적어도 북한과 대치하는 한국 현실에선 최선의 민주주의다.' 지금 들으면 참으로 가소로운 소리지만 당시엔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에 빠져들었다. 박정희가 간 지 30여 년, 이른바 '민주화'가 시작된 지 20년, 개념 흐리기의 전통은 여전하다. '한국식 민주주의'는 '한국식 진보'로 바뀌었을 뿐이다. 요컨대 노무현이나 유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진보가 서구식 진보와는 다르지만 적어도 수구 세력과 대치하는 한국 현실에선 최선의 진보다'
개념 흐리기가 그 얼토당토않음에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한국 현실'이라는 포장 때문이다. 군사 파시즘을 무작정 민주주의라 우기거나 신자유주의 개혁을 무작정 진보라 우기는 게 아니라 '물론 서구식 기준에서 볼 땐 아니지만' 이라고 먼저 한 발 뺀 다음 '그러나 한국 현실에선' 하며 옭아매는 것이다. 세상에 내가 사는 사회의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지당한 말씀에 반대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렇게 민주주의는 아주 오랫동안 유보되었고, 또 진보는 아주 오랫동안 유보되고 있는 중이다.
p121
가난은 적게 소유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몫을 늘리느 보다 정당한 삶이며, 적은 땅을 사용하고 적게 소비하고 적게 태움으로써 파괴되어가는 지구에 생명의 도리를 다하는 보다 품위 있는 삶이다. 품위마저 사들인 부자들은 세상에서 가난의 품위라는 것을 도려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바야흐로 품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 전쟁에서 질 때, 그래서 아이들이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살아가는 제 아비 어미를 수치스러워하게 될 때 우리 삶도 끝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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